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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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aper Jewelry

지승 장신구


  "러한 한지의 특성은 무게의 제약없이 주얼리의 부피감을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소재로 나에게 다가왔다."


평소 우리나라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각 분야의 장인에게 전통 공예 기술을 습득하여 전통을 재해석한 장신구를 제작해왔다. 금속공예, ‘규방공예’라고 불리는 한국 전통 바느질 기법을 기반으로 한 섬유작업, 전통 매듭, 자연 염색, 완초공예, 한지공예에 이르기까지 여러 재료들의 물성과 공예기법을 탐험하고 시도하며 작업하던 중 한지와 지승공예를 만나게 되었다. 한지는 한국의 고유한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종이로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다. 한지는 통풍이 잘되고, 질기며 보존력이 우수하다. 또한 홑줄과 겹줄로 엮어 입체물로 만들게 되면 물에 젖어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정도로 뛰어난 내구성을 지니며 무엇보다도 가볍다. 이러한 한지의 특성은 무게의 제약 없이 주얼리의 부피감을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소재로 나에게 다가왔고, 나의 창조작업에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나의 주얼리는 한지를 주재료로 하여 한국의 전통공예기법인 지승공예를 활용하여 제작되었다. '지승'은 한지를 가늘고 길게 잘라서 새끼를 꼬아놓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지승공예'란 지승으로 기물을 만드는 기법을 말하며 조선시대 선비들이 공부를 마친 책의 종이를 재단하고 꼬아 엮어서 다양한 기물을 만든 데서 유래하였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종이로 만든 공예품들은 당시 상류층의 고급스러운 생활소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특별한 예술작품들이 박물관 안에서 유물로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 일상 속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이러한 열망은 자연스럽게 지승 장신구 제작으로 이어졌고, 주로 전통공예품으로 제작된 지승공예 기법을 장신구 영역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정형화된 틀을 깨고 한지와 지승공예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 한지의 가벼움과 변형이 용이한 특성 덕분에 장신구에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더욱 과감한 창의적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작가 개인의 예술적 개념과 표현적 가치를 강조하는 현대 예술 장신구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지승 장신구는 현대 장신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통 공예 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지니며, 이러한 반전 요소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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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승 주얼리는 한지로 실을 만들어 계속 종이를 잇고 엮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완성된다. 가늘고 길게 자른 한지를 엄지와 검지로 비벼 홑줄을 만들고, 홑줄 두 대를 꼬아 겹줄을 만든다. 홑줄을 씨줄, 겹줄을 날줄 삼아 차곡차곡 교차해가며 양손만을 사용하여 형상을 엮는다. 구체적 모습이 갖춰지면 묽은 찹쌀풀을 2~3회 발라 코팅하여 마감한다. 주재료부터 마감재까지 자연에서 온 재료로 잘라내지 않고 끊임없이 잇고, 엮어가는 반복적인 행위는 곧바로 나를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된 것처럼... 나에게 있어 작업은 내 안의 자연을 구현하는 일이다. 마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듯, 손끝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나의 것을 보고 싶은 갈망이 언제나 나를 작업으로 이끈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를 주재료로 삼아 찹쌀풀로 마감한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색’이라 불리는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색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이 변화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햇살에 조금씩 물들고, 공기와 시간을 머금으며 조용히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어느 순간 문득 바라보면 색이 한층 깊어지고 결이 차분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변화는 마치 계절이 바뀌는 속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며,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익어가는 흐름과도 닮아있다. 그렇게 작품은 나의 손을 떠나서도 시간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며, 자연의 일부로서 계속해서 변화하며 존재하게 된다. 나의 작품을 통해, 내 안의 자연이 타인의 자연과 공명하고, 그들의 내면 속 자연도 조용히 깨어나도록 속삭이고 싶다.